2008년 8월 26일 화요일

8월 마지막주(5째주) 축구 중계 일정

아래 편성표는 방송국의 사정으로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자주 변경 됩니다.T T


08월 25일 월요일
19:00 KBSN 축구 날아라 슛돌이 4기 (22) (본)
21:00 MBCESPN 뷰티풀 사커(16) (본)


08월 26일 화요일
00:00 MBCESPN 2008~2009 EPL 하이라이트(2) (본)
05:00 KBSN 축구 2008 하나은행 FA CUP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울산 vs 부산 (재) 
02:00 MBCESPN 2008~2009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웨스트브롬위치vs에버튼 (재)
04:00 MBCESPN 2008~2009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위성생중계) 포츠머스vs맨체스터Utd (생)
12:00 KBSN 축구 삼성하우젠 2008 K리그 -인천 vs 포항 (재)
14:00 MBCESPN 2008~2009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포츠머스vs맨체스트Utd (재)
22:00 MBCESPN 2008~2009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포츠머스vs맨체스트Utd (재)


08월 27일 수요일
04:00 MBCESPN 2008~2009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풀럼 vs 아스날 (재)
05:00 KBSN 축구 삼성하우젠 2008 K리그 -인천 vs 포항 (재)  
08:00 MBCESPN 뷰티풀 사커(16) (재)
12:00 KBSN 축구 삼성하우젠 2008 K리그 -전북 vs 울산 (재)  
13:00 MBCESPN 2008~2009 EPL 하이라이트(2) (재)
22:00 MBCESPN 2008 K리그 컵대회(Delay)수원 vs 인천 (녹)
22:00 SBS Sports [2008 프로축구컵 대회 <수원:인천>]  (녹)


08월 28일 목요일
05:00 KBSN 축구 삼성하우젠 2008 K리그 -전북 vs 울산 (재)  
08:00 MBCESPN 2008 K리그 수원 vs 인천 (재)


08월 29일 금요일
00:35 SBS-TV 스포츠 중계석
01:00 MBCESPN 2008~2009 EPL 매거진 (2) (재)
04:00 MBCESPN 2008~2009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웨스트브롬위치vs에버튼 (재)
08:00 MBCESPN 2008~2009 EPL 매거진(2) (재)
14:30 XPORTS 풋볼 아시아 (136회) (본)


08월 30일 토요일
03:00 MBCESPN 유럽축구 골스 (본)
03:30 MBCESPN 2008 UEFA 수퍼컵 (위성생중계) 맨체스터Utd vs 제니트 (생)
05:30 MBCESPN EPL 월드 (본)
14:00 MBCESPN 2008 UEFA 수퍼컵 맨체스터Utd vs 제니트 (재)
20:30 SBS Sports [2008 K리그 <서울:광주,상암생중계>] (생)
21:30 MBCESPN 유럽축구 골스 (재)
23:00 MBCESPN 2008~2009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위성생중계)-D 볼튼 vs 웨스트브롬위치 (생)


08월 31일 일요일
00:55 MBC-TV 스포츠 매거진
02:00 SBS-TV 스포츠 빅이벤트
01:00 MBCESPN 유럽축구 골스
01:30 MBCESPN 2008~2009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위성생중계)-S 아스날 vs 뉴캐슬 (생)
04:00 MBCESPN 2008~2009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Live 녹화)-S 에버튼 vs 포츠머스 (녹)
05:30 MBCESPN EPL 월드 (재)
05:30 MBCESPN EPL 월드 (재)
12:30 Xports 풋볼 아시아 (136회) (재)
13:40 MBCESPN 2008 UEFA 수퍼컵 맨체스터Utd vs 제니트 (재)
14:30 MBCESPN 2008~2009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볼튼 vs 웨스트브롬위치 (재)
16:30 MBCESPN 유럽축구 골스 (재)
19:15 UTV [2008 K리그 <수원:부산(수원)>] 
20:30 SBS Sports [2008 K리그 <수원:부산,생중계>] 
21:30 MBCESPN 2008~2009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위성생중계)-E 첼시 vs 토트넘 (생)
23:30 MBCESPN 유럽축구 골스 (재)


09월 01일 월요일
00:00 SBS Sports [2008 K리그 <수원:부산>]  (재)
01:05 KBS-2TV 일요스포츠중계석

2008년 8월 4일 월요일

평강의 왕 예수님(기독교보 송년호 시론 06년 12월 24일)

평강의 왕 예수님
                                                       
 유 해무

  로마 제국이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했지만, 이방풍습은 상당 기간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354년경에 로마교황은 태양신의 출생일인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변경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연중 해가 가장 짧아 춥고 음산한 시절에 촛불을 켜고 의로운 해(태양; 말 4:2)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면서 묵은해를 반성하고 새해를 대비하며, 나아가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고 준비하는 풍습이 생겼다.
  예수님은 의의 태양이실 뿐 아니라 샬롬, 곧 평강의 왕(사 9:6)으로도 오셨다.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는 천군 천사들의 찬양은 구약 말씀의 성취이다. 성경은 샬롬을 평강, 평화, 화평 등으로 번역한다.
  ‘세상에는 참 평화 없어라’는 비발디의 유명한 칸타타가 불현듯 생각이 난다. 실로 그러하다. 세상에는 평화가 없다. 처처에서 일어나는 갈등, 시기, 무력 충돌, 고소와 고발 등을 보라. 사학법, 佛者임을 내세운 황 우석 박사와 관련된 진실 게임도 평화가 없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전쟁과 자연재해 그리고 조류독감과 같은 것이 우리를 위협한다.
  그런데 교회는 어떠한가? 평화의 사도로 보냄을 받은 교회는 진정한 평화의 도구인가? 필자는 연초에 ‘신앙과 이데올로기’로 본보의 시론을 열었다. 화해이신 예수님 안에서 서로 연합하되, 참 신앙만이 대의명분(이데올로기)을 제압하고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우리 가운데에 연합을 찾기 힘들 뿐 아니라,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파당을 만들어 자기 권리는 변호하지만, 겸손이나 사랑의 용서는 희귀하고, 당하면서도 미소 짓는 신앙의 여유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런데 한해를 지난 지금의 심정은 그때보다 더 착잡하다. 단적인 예가 성도간 세속 법정에서의 송사이다. 특히 명예 훼손건이 계속 줄을 잇고 있다. 우리 가운데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는가?
  우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시기와 분쟁이 있다(고전 3:3). 그러니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하신 우리의 화평이시다(엡 1:10; 2:14). 성령님은 평안의 줄로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엡 4:3). 시기와 분쟁을 인하여 하나임을 나타내지 못하면, 그것은 예수님과 성령님의 사역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큰 범죄, 곧 성령훼방죄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가 주실 평안이 세상의 평안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셨다(요 14:27). 그 평강은 세상의 방식으로 오지 않았다. 곧 고난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평강의 왕은 무력과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빌리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은 세상 권세의 상징인 검으로 무장하고 겟세마네로 왔다. 그때 제자 하나가 그 검을 휘두르지 않았는가! 이에 예수님은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2)고 하셨다.
  평강의 왕께서는 검의 권세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버리는 권세를 가지셨다(요 10:18). 평강의 왕은 한 알의 밀알로서 죽고 살아나셔야 많은 생명을 열매로 얻는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는 이렇게 목숨을 버리는 권세를 행사하사, 많은 목숨을 살리는 십자가와 부활로 화평의 왕에 등극하셨다. 이 부활의 주님만이 우리에게 평강을 선포하실 수 있다(요 20:19).
  바울 서신 대부분이 평강을 빌면서 시작하는데, 이 평강은 평강의 왕께서 성령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가 화평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10:34). 주님 자신은 참 평화와 거짓 평화의 잣대요 갈림길이다. 참 평화는 주님 그분이시기 때문에, 주님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는 거짓 평화를 우리가 성령님의 평강의 능력으로 잘라내어야 참 평화가 임한다. 고난이 없는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니다.
  우리 교단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분쟁의 아픔을 겪고 있다. 그 중심에는 우리의 자랑이라는 대학교와 병원이 있다. 병원 정상화는 그 길이 멀어 보이고, 대학교도 신입생 모집이 여의치 않을 듯하다. 모름지기 이런 기관에는 성경말씀과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나온 원리가 지배해야 하지만, 세속적인 기준이 자주 세도를 부린다. ‘복음’병원이 복음 전파에 얼마나 기여를 하는지, 아니면 거침돌이 되는지를 직시해야 한다. 이런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없는 한,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 교단에 참 평화를 주시지 않을 것이다.
 시기와 분쟁이 참 평화를 훼방한다. 그리고 싸움과 다툼은 욕심에서 나온다. 그러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의 준행자일 뿐, 재판자는 아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는 하나님 한 분 뿐이다(약 4:12). 이것을 무시하고 잘잘못을 따지거나 자기변명에만 급급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롬 2:24). 모독은 참람죄를 말한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미 현실적 무신론이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실 지도 모른다.
 “고난 없이 세상에는 참 평화 없어라. 선하신 예수님, 주님 안에 순수하고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비발디의 칸타타 가사의 전부이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약 3:18).
 평강의 하나님께서 참 평강을 주실 것을 간절히 기원한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되, 종말론적 평강을 소망하자. 성령님의 평안의 줄로 하나 되기를 힘쓰는 새해를 이루자.

고신교회가 잃어버린 것들: 회개와 개혁(월간고신 06년 7월호)

고신교회가 잃어버린 것들: 회개와 개혁
                             
유 해무(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 회개와 개혁
 고신교회의 출발과 존재 의의는 한국교회를 위한 회개와 개혁이었다. 우리 선배들은 회개와 개혁운동을 진리운동이라 불렀다. 그들은 이를 위한 방편으로 고려신학교를 세웠고, ‘고려파’라는 고신교회의 별호는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교회를 뜻한다. 고신교회의 역사는 고려신학교의 역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60년 전 7월은 고려신학교 설립의 전주곡인 진해신학강좌(1946,6,23-8,20)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그해 9월에 개교한 고려신학교는 신학사상의 통일과 한국교회의 개혁뿐만 아니라, 국가를 성경 진리에 기초하여 설립되도록 하며, 대학과 학문의 문화운동을 포함하는 정통신학운동을 목표로 삼았다.
 1952년 9월에 어쩔 수 없이 조직된 총노회는 그 발회식 선언문에서, 해방 이래 참된 회개운동과 칼빈이 시작한 개혁주의 운동을 계승하겠다고 천명한다. 1956년 9월 “개혁운동 10주년 기념집회”와 더불어 총노회가 총회로 개편한다. 선배들은 고신교회의 출발과 존재 의의를 회개와 개혁이라고 재확인한다. 만 50년 전의 일이다.
  선배들은 겸손하면서도 당당하였다.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였으나 개혁파 전통에 대한 넓은 안목과 확신을 가지고서 갖가지 비난과 코웃음(鼻笑)도 개의치 않았다. 자기들을 비웃은 한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의 위선에 대해서 당당하게, “진리운동은 최후일각까지며, 전진이 있을 것뿐이고, 후퇴는 없다”고 선언하였다.
  우리 후배들에게 이런 당당함이 있는가? 믿음의 지조를 지키면서 한국교회를 향하여 회개와 개혁을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회개와 개혁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는가?

 2. 우리의 현실
 후배들은 선배들과 같이 우리의 정체성을 한국교회의 ‘회개와 개혁운동’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회개와 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고신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개혁운동 10주년 기념집회 강사였던 박 윤선 목사는 교회당 쟁탈 문제로 야기된 성도간의 법정 송사 문제를 개혁해야 할 현안으로 제시했다. 한국교회를 개혁하겠다는 원대한 목표에 앞서, 내부의 개혁을 호령하였다.
 박 목사가 주일 성수 연고로 교수직에서 해임 당했지만(1960,9월), 그 이면에는 교권의 횡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때로부터 고신교회는 인재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세평을 듣는다. 신학교와 교회 안에서 회개와 개혁의 선봉장으로서 고신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전파하던 분을 교권으로 해임한 것은 고신교회가 출범 취지에서 밝힌 존재 의의를 스스로 버리는 꼴이었다.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 성도간의 송사를 보라. ‘고소파’라는 혹평이 빈말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때부터 고신교회 안에는 현안들을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풀기보다는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는 분위기가 정착한다.
 이것은 회개로써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고, 신학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를 개혁하겠다는 원래의 목표에도 타격을 입힌다.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교회들은 한국교회의 회개와 순수한 복음 전파를 통한 교회 개혁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이를 구체적으로 담당하는 신학교를 재정적으로도 후원한다. 그렇지만 이런 관심이 결국은 신학교를 교권 투쟁의 결투장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고신교회 내의 정치 계파의 기원이다. 우리의 선배들은 교권주의자들이 휘두른 교권의 희생자가 아니었던가? 이런 작태를 개혁하기 위하여 세운 신학교가 고신교회 교권의 중심이었다는 것은 한국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출발 정신과 상충한다.
 안타깝게도 고려신학교는 정치 회오리의 중심에만 있었을 뿐, 능동적으로 교단의 여론을 주도하지 못했다. 고신교회가 영적 위기에 처한 이 순간에도 신대원의 적극적인 태도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신학은 ‘교회의 교사’의 입지를 신학적으로 정립하고 정치를 초월하지 않는 한, 교단의 여론을 주도할 수 없고, 정치와 교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를 향하여 개혁을 외치기에 앞서 고신교회의 내부 개혁을 부르짖었고, 그러면서도 교권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고신교회의 정체성을 품고서 고신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박윤선 선배가 그리운 것도 이 때문이다. 신학교가 한국교회의 회개와 개혁운동이라는 본래의 목표에 전념하지 않는다면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3. 고신교회의 바벨론 포로
 부활하신 주님은 자기 교회를 신학교가 없이도 존속시키실 것이다. 병원과 대학교가 없어도 주님의 교회는 건재할 것이다.
 우리 선배들은 교회개혁과 더불어 국가까지 포괄하는 칼빈주의 문화운동을 사명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방법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기실은 그 사명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기초가 부족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 기관들의 인가나 확장 과정에서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해법에만 치중하였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원리에 대한 원론적인 토론을 습관화하지 못했다. 따라서 불법, 탈법, 편법이 득세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고신교회의 바벨론 포로이다.
 고신교회의 현실은 학교법인의 관선이사 체제로 대변된다. 병원의 확장과 大學病院化, 이의 기초가 된 의과대학 설립, 이것들의 기초가 된 고려신학대학의 인가부터 어떤 일들이 있어왔는지는 잘 알려진 비밀이다. 이에 대한 회개와 개혁운동이 우리 중에 펼쳐진 적이 있는가? 한국교회를 향하여 회개와 개혁운동을 펼치려던 장엄한 목표는 출발선을 넘자마자 좌초하기 시작한다.
 우리 선배들은 교회와 신학의 연합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2000년대에 들어와 한국교회의 연합 운동은 유행처럼 힘을 받아가고 있다. 여기에 고신교회도 뒤지지 않고 있다. 고려신학교의 출범 자체를 한국장로교회의 첫 분열로 보려는 부담감도 묻어 나온다. 그러나 후배들은, 축출당하면서도 한국장로교회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선배들의 당당함을 잃어버리고 있다. 회개와 개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는 연합은 선배들이 받은 핍박을 욕되게 함이요, 고신교회의 존재의의를 부인하는 일이다.
 고신교회와 유관 기관들은 우리 선배들이 언급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스스로 믿음의 지조를 유린하고 있다. 진보주의라는 신신학 사상과 사이비한 복음주의, 허울 좋은 보수주의,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까지 사랑하여 달라는 화평론과 타협정신이 교권을 타고서 고신교회 속에 들어왔고, 교회를 현세생활처세의 도구로 삼고 말았다. 이것들은 총노회 발회식 선언문이 개혁하려던 바이었으니, 이제는 고신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4. 화합하고 포용하는 마음을!
 고신교회는 회개하고 먼저 자기를 개혁해야 한다. 우리는 말로만 ‘전전 부패’를 외쳤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썩은 존재인지를 모르고 있다. 사유(赦宥)의 은혜를 구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성령님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을 위장한 이데올로기의 횡포 속에서 영이 죽고 말 것이다.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전 7:10)함이 지혜가 아니라 우매함인 줄 알지만, 한국교회를 향하여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다가 ‘독선주의자’로 비난을 받던 선배들이 그립다. 후배들 사이에는 회개와 개혁정신도 실종하였을 뿐 아니라, 서로 포용하고 칭찬하고 사람을 아끼는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고신교회여, 회개하고 개혁하며, 화합하라!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내침을 당하리라!(계 3:16)


출처 : http://haemoo.sarang.net/

[유해무]고신교회와 교회정치(기독교보 06년 8월 12일)

고신교회와 교회정치            
유해무
       

1. 교회정치가 아니라 교회법이다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 교황의 출교 위협 칙서를 공개적으로 태웠다. 신학책과 더불어 교회법전도 분서하였다. 출교칙서가 성경이 아니라 그릇된 중세신학과 교회법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신학과 교회법을 넘어 ‘오직 성경’으로 돌아갔다. 종교개혁교회는 성경만을 교리와 교회법의 기초로 삼아,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의 법을 새롭게 제정한다. 이처럼 개신교회의 교회법은 항상 비판적 기능을 지닌다.
 교회회의는 교리뿐만 아니라, 교회정치, 권징과 예배를 포괄하는 교회법에 대한 결정도 하였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고백한 니케아회의(325년)는 교회법도 결정하였다. 가령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직분을 받은 교회에서만 봉사해야 한다.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는 출교시키고 면직시켜야 한다. 이단에게는 재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이처럼 교회정치는 교회법의 일부이다.

2. 모든 것이 정치이지만, 정치가 전부는 아니다
 이 전통을 따라 우리 「헌법」은 먼저 교리를 그리고 교회법을 담고 있다. 즉, 웨스트민스터 신조들은 교리로서 앞서고, 교회법인 교회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지침이 다음에 나온다. 교회정치는 교회법의 일부이며 성경을 요약한 교리의 지배를 받는다.
  교회정치가 정치 자체뿐만 아니라 권징과 예배를 지시하고 있으니, 모든 것이 교회정치와 연관하고 있으니, 전부가 교회정치라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정치가 전부는 아니다. 교회가 무엇인지는 교리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교회정치가 전부인 것과 같은 인상은 왜 들까? 각 치리회는 교회정치와 권징조례에 관한 한은 가능하면 정확한 유권해석을 도모하며 그에 따라 일을 처리하려고 애를 쓴다. 반면에 예배지침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유롭고, 교리표준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관심하다. 고백서와 대교리문답를 1969년도에야 비로소 신조로 채택했기 때문에 교회정치는 교리의 지배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다 커버리고 말았다. 종교개혁이 교리의 개혁과 더불어 교회법까지 개혁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교회정치가 얼마나 성경적인지를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때가 되었다.

3. 총회가 마치면 단지 폐회인가, 파회인가?
 우리 교회정치가 안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총회의 폐회에 관한 규정에서 살펴보자. 회장은 “교회가 내게 위탁한 권한으로 지금 총회는 파함이 가한 줄 알며...”(104조)라고 선언한다. 총회는 교단이 매년 한 번 사용하는 회의제도에 불과할 뿐 상비 단체가 아니니 총회를 교단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총회는 모였다가 흩어진 후에는 없어진다(파회). 이와 같은 제도는 본래 ‘총회’라는 이름으로 교권을 만드는 병폐를 막기 위한 것이다.

4. 장로교회정치냐 회중교회정치냐?
 장로교정치는 교황/감독정치와 회중정치를 다 배격하고 중도를 취한다. 장로교회정치는 애초부터 중앙집권적인 교황제나 감독제와는 달리 지역교회의 완전한 권리를 인정한다. 그런데 이제는 총회가 이런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띠면서 지역교회를 의미하는 地교회가 枝敎會로 오해되고 있다. 이것은 교회론적으로 큰 오류이다. 노회나 총회는 사실상 당회로부터 위임받은 권위 외에 다른 권위가 없다. 교회정치에서 당회가 먼저 나오는 것이 ‘하회’이기 때문이 아니라 원초적인 치리기관이기 때문이다. 노회나 총회는 지역교회의 당회가 위임하지 않은 어떤 것도 다룰 수 없고 명령할 수 없다.
 장로교회는 노회와 총회를 인정하지 않는 회중정치도 거부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회중정치가 장로교회 안에 상당히 깊이 들어와 있다. ‘목장교회’라는 목회방식은 회중정치를 표방하는 침례교회에서 발생하였다. 목자가 당회의 고유 업무인 ‘교인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총찰’을 맡게 되니, 당회는 유명무실해질 위험이 크다. 또 이른바 ‘민주적인 정관’은 중앙집권적 경향을 거부하고 교인의 주권을 앞세우면서 당회를 약화시킨다.

5.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자!
 장로교회의 정체성이 위기에 처해있다. 우리 개혁파 선배들은 장로교정치제도가 가장 성경적임을 확신하였다. 이 제도가 한국에까지 전수되는 과정부터 운용되는 현재까지 장로교의 정체성은 계속 위협을 받았다. 고신교회는 한국장로교회의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면서 정체성을 확보하고 유지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교리의 회복뿐 아니라 교회법 전반에 대한 검토와 반성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예배지침은 유명무실하며 교리는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난듯하다. 권징조례는 그런대로 대우를 받으며, 교회정치는 전면에 부각된다.

크리스천 라이프(82호), 커버 스토리 - 유해무교수의 신앙강좌

 대양주한인예수교장로회(고신)뉴질랜드정기노회가 지난 3월 31일~4월 2일 한우리교회(남우택목사)에서 열렸다. 이번 정기노회에 신앙과 신학강좌의 초청강사로 온 유해무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를 만나 이민자의 신앙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2008년)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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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복잡하게 얼킨 실타래를 물레에 감아다시 풀어놓는 것처럼 어렵고 무겁게 느 껴지는 신학적인 주제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해 주는 유해무교수. 화란 개혁파신학교에서 7년 반 동안 공부하여 교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유교수는 자녀들도 지금 화란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민과 성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설명했다.

이민자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시편 1편 1절에 나타난 복있는 사람과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의 관계를 풀어 설명하면서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에 대하여 바르게 알 필요를 강조했다. 악인들은 머리로 꾀를 짜 내는 사람으로 겉으로는 죄가 드러나지 않는다. 죄인들은 머리로 짜 낸 꾀를 가지고 길에 나서서 행하는 사람이다. 오만한 사람들은 꾀를 짜서 실행하고나서 재미를 느껴 사람을 무시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멸시한다.
  악은 반복되면서 악순환을 가져온다. 악인들은 죄인들로 이어지고 오만한 자들과 같이 되어 끼리끼리 패거리를 만들어 악순환이 된다. 남을 해꼬지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모여든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 포위되고 있는 형편이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은 패거리를 이루어 자기 이익을 위해 꾀를 내고 독을 품은 말을 하고 살기가 등등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고 살아도 세상에서 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오히려 세상에서 형통하다. 사람들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여도 천벌을 받기보다는 모든 것이 잘 되는 것같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에서 고통과 고난을 받으며 사는 신앙인은 왕따를 당하고 있다. 바보로 취급받고 있다. 순진한 사람으로 여긴다. 철저하게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사는 사람이 성경에서 복이 있다고 하면 과연 누가 믿겠는가.
  불공평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이 억압과 폭력 속에 살면서도 언제까지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하는가. 시편1편2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통해 즐거워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할 뿐 만 아니라 밤낮으로 궁실거릴(중얼거리는)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영적 통찰로 인해 악인들의 꾀를 쫒지 않고 죄인들의 길을 피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가지 않게 된다.

이민은 누가 선택을 하고 떠나는가
  한국을 떠나 이민을 온 사람은 쫓겨 온 것도 아니고 밀려온 것도 아니고 실패해서 온 것도 아니다. 이민은 떠돌이나 뜨내기인생이 절대로 아니다. 이민으로 인해 인생이 불쌍하거나 괴로운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는가. 철저한 외국인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어 왕따당한 마음으로 산다고 해서 믿음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시편 1편 3절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말씀이 나온다. 스스로 심은 나무를 보았는가. 나무는 스스로 심기지 않는다. 나무는 누군가가 심는 사람이 있다. 다시 말하면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여호와 하나님이 심으셨다.  
  '시냇가'는 비가 와서 자연적으로 생긴 물길이다. 하지만 본문에 나타난 시냇가는 농부가 심을 나무를 위해 판 것이다. 나무를 옮겨 심은 것처럼 이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택하여 이 땅에 옮겨 온 것이다.
  나무를 심기 위해 이식하듯이 사람을 이민(?)당하게 했다. 하나님에 의해 이 땅에 심기워졌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이민을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는 말씀처럼 이민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선택된 것이다.

이민의 땅에서 성도들의 사명은 무엇인가 
  어느 땅에든지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 시편 1편 5절에는 1절에 보이던 단수의 복 있는 사람이 복수로 나타난다. 한 사람의 복 있는 사람이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살았지만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같이 복이 있는 한 사람이 죽어 복이 있는 사람들을 많아지게 하고 있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의 땅에 직접들어 가서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의 사이에서 살면서 함께 먹고 자며 복음을 주셨다.
  방관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사는 시궁창과 같은 세상에 복있는 한 사람이 침투하고 쳐들어 가서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귀순'시켜야 한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에게 가서 한 영혼을 구원하여 훔쳐 나와 복 있는 의인들의 회중에 들게 해야 한다. 시편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고 있는데 시편1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이 땅에 옮겨 심겨져 복있는 사람으로 세우고 사명을 주어 가정, 직장, 한인사회, 다민족에게 다시 복음을 전해 온 세계가 의인의 회중에 들게 만들 책임이 있다.                        
                                                글/이승현편집인
                                         사진/김 웅<프리랜서>

출처 : 크리스천 라이프( http://www.christianlife.co.nz/bbs/zboard.php?id=ch_01&no=65 )

[유해무]예수님의 길, 고난의 길

예수님의 길, 고난의 길

SBS "신의 길, 인간의 길"을 보고.
유 해 무


        SBS는 4부작 ‘신의 길 인간의 길’을 서둘러 종영하였다.1) 한국교회가 취한 강한 대응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는 이런 프로그램에 놀라고 분노할 수밖에 없다.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면 아주 이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곱씹어볼 거리이기도 하다.


        1. 의심이 가는 제작 의도

        SBS의 의도는 방대한 답사와 현지 취재를 기초로 역사적 예수를 추적하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학적인 기독교 교양 강좌가 아니다. 그랬다면 다른 종교의 반발을 유발했을 터이다. 방영 초기부터 나온 반응은 정반대인데, 개신교회가 크게 반발하였다. 상업 방송이 성탄절도 아닌 시절에 무슨 객관적인 프로그램을 방영하겠는가.

        평화와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 그것도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왜 서로 질시하고 때로는 살인을 자행하는지를 두고 그 뿌리를 추적한다. 한편으로는 이 종교들의 교리와 실천의 분리 현상을, 다른 편으로는 이미 폐쇄성을 지닌 교리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를 집중하여 분석하면서, 그중에서도 왜 한국교회가 폐쇄적이고 도발적인지를 풀어보려고 한다. 기독교의 뿌리인 예수님은 허구이거나 역사적 인물이라 하여도 신격화된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프로그램은 기독교의 교리와 실천을 비판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의욕적으로 예수님을 비신격화하려는 의도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SBS의 의도에는 다분히 시사적인 정치적 측면도 있다. 즉 촛불집회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도발적인 선교의 배경에는 혈맹관계인 미국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교회의 친미적 성향을 부각시킨다.


        2. 합리성을 앞세운 편파성

        ‘기독교 교리는 허구나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기 위하여 기독교 유적지 답사와 취재, 여러 학자들을 인터뷰한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이적과 기사,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부활, 재림, 심판과 천국 등은 결코 기독교적이지 않고 독창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디오니시오스나 미트라스와 같은 신화적 영웅이나 성인과 동일시하려고 애를 쓴다.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스와 로마에는 많은 영웅 신화가 있으며, 이것들을 유대적 배경으로 채색하여 역사적 예수가 출현하였다는 논리이다. 예수님께서 구약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합리성을 앞세운 편파성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 프로그램의 관점은 종교 현상학이나 비교종교학이다. 예수님을 다양한 지역의 역사, 문화나 종교 속에다 분해시키고는 역사적 예수는 없다는 식이다. 광신적인 한국교회는 합리적이지 않고 신화 내지는 역사를 가장한 예수상(象)을 벗어던지고 합리적인 인간이 되라는 권면까지 담고 있다. 미국이 이슬람과 치르는 성전(聖戰)의 배경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선신과 악신의 이원론이 있다는 식이다. 과연 공중파 방송이 이런 식으로 편파적인 가치관을 방영하여도 되는가. 합리성을 앞세운 편파성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3. “온유와 두려움”(벧전 3:15)이 필요한 한국교회

        어쩌다 한국교회가 이런 지경까지 오고 말았는가. 일전에 다른 공중파 방송도 한국교회의 치부와 특히 소수의 목회자의 호화로운 사생활까지 들추어내었다. 한국 사회가 교회를 바라보는 눈초리를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반성해야 한다.

        SBS 사옥 앞에서 교인들이 시위한 것이 어느 정도 ‘성경적’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언론중재위원회나 방송윤리위원회에 제소하여 합리적으로 해결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아니 이보다는 더 “예수님의 길,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다.”(벧전 2:21) 예수님은 권세와 힘을 가지셨지만, 아예 사용하시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이 길을 걸어가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폄훼를 당한다. 주후 120년경에 행한 最古의 설교를 읽어보자(제 2 클레멘스서 13장).

        “형제들아, 이제 길게 회개하자! 그리고 선을 향하여 바로 서자! 우리가 어리석음과 사악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전의 범죄를 지워버리자! 마음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누리자! 사람에게 아부하거나 우리끼리만 기쁘게 하지 말고, 의를 위하여 외인들도 기쁘게 하여, 우리 연고로 하나님이 훼방을 받으시지 않게 하자! 여호와께서는,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느냐? 무엇이 더럽히는 것이냐? 내가 원하는 바를 행치 아니함이 곧 훼방이니라”(사 52:5)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이방인들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말씀의 빼어남과 가치에 놀라지만, 우리의 몸가짐이 그 말씀에 합당하지 않음을 나중에 전해 듣고는 훼방의 기회로 삼아서 그 말씀은 신화요 사기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저들은 우리에게서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눅 6:32-34)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는다. 들을 때마다 이 말씀의 뛰어난 선하심에 놀란다. 그러나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고, 심지어는 우리를 사랑하는 자조차도 사랑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우리를 조롱하기 시작하니, 곧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는다.”

        한국교회가 짓밟히고 있는 것을 그냥 ‘사단의 책동’이라고 일언지하에 단정하지 말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원불변한 진리이지만, 우리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받고 있지 않는지 베옷을 입고 살필 때이다. 우리가 가진 소망을 묻는 자에게 대답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다.”(벧전 3:15-16)


        4. 말과 실천의 변증학이 절실히 필요하다

        프로그램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인터뷰에 응한 한국인 신학자들의 발언은 실망을 자아내었다. 게다가 해설자 문 성근씨는 유명 신학자의 자제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안팎으로 비판과 공격을 받는 시절이 되었다. “고난의 길”을 말과 실천으로 변증하여야 한다.

        먼저 말과 글로 진리를 변증해야 한다. 성경이 말씀하고 교회가 고백하는 진리를 ‘합리적’으로 변증하는 학자와 교인을 양성하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 여러 차례 방송에서도 나온 장면인 ‘성령 충만’은 합리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비난거리로만 남을 것이다. 특히 이번 방송에 대해서는 신약학자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요 진리이심을 온유하고 두려움으로 답하고 변증해야 할 거리가 많다.

        두 번째, 실천으로 변증해야 한다. 방송에 나온 어떤 한국인 신학자는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임을 강조하였다. 이것을 알면, 교회와 신자들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 폐쇄적이거나 독선적인 태도를 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신자마다 왜 우리가 이런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깊이 반성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겸손하게 실천해야 한다. 특히 교회가 세속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사회의 이념적 대결의 현장에 섣불리 교회의 이름으로 개입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받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 알게 모르게 깔려있는, 군림하려는 승리주의는 그 흔적이라도 제거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말씀이 부족하셨기 때문인가? 아니다! 고난의 길이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고난의 길을 삶으로 실천하자. 교회는 항상 핍박을 받아왔고, 온유하고 두려움으로 핍박자를 “의인들의 회중”(시 1:5) 속으로 인도할 때에 부흥하였다. 한국교회는 확실하게 기로에 서있다. 흥분하지 말고 온유하게 고난의 길을 걸으며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이심을 말과 실천으로 증거하자.


1) 2008년 6월 29일(일),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7월 6일(일),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 7월 12일(토), “남태양의 붉은 십자가”, “길 위의 인간”. 네 번 매 주일 저녁에 방영하려는 애초의 계획을 바꾸고, 속히 종영하였다.